점자표기 없는 생활용품 “내용물 구별 못해”

by 관리자 posted Oct 15,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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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자표기 없는 생활용품 “내용물 구별 못해” 

유통기한 지난 식품 사먹고 복통·설사도
터치스크린 방식 ATM 시각장애인 외면

앞을 보지 못하는 유영인(32)씨는 화장품을 사용할 때마다 흔들어 보는 버릇이 있다. 출렁거림의 정도로 스킨인지 로션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성이 비슷한 샴푸와 린스는 좀체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또다른 시각장애인 이 아무개(35)씨는 얼마 전 동네 슈퍼마켓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유제품을 사먹었다가 심한 복통과 설사에 시달렸다.

보건복지부 통계로, 우리나라 전체 장애인 200여만명 가운데 10%인 20여만명이 시각장애인이다. 그런데 시중에 판매하는 생활용품에 점자 표기가 된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해 시각장애인들이 큰 불편을 겪고 있다. 마침 15일은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흰지팡이의 날’이다. 정작 장애인들은, 일회성 행사나 이벤트보다 일상생활에서 겪는 불편에 공감하고 사회적 배려를 실천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수천 가지의 일반 소비재 상품 가운데 점자 표기를 한 것은 진로소주의 참이슬 프레쉬, 하이트맥주의 먹는샘물 퓨리스, 크라운제과의 초콜릿, 동화약품의 후시딘을 비롯한 일부 의약품 등 손에 꼽을 정도다. 최근엔 나드리화장품이 내놓은 기능성 화장품 ‘베르당’과 샴푸 ‘시크리티스’도 용기 겉표면에 점자를 넣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나드리의 이현석 마케팅실장은 “시각장애인들도 화장을 하며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가 있다. 소수자 배려는 작은 것 하나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점자 표기를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2008년 7월부터는 아이스크림 등 모든 빙과류에도 점자 표기와 제조일·유통기한 표시가 의무화된다.

점자 표기의 내용도 아직 미흡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진로’, ‘맥주’, ‘음료’ 등 회사명이나 제품 종류 표시 위주다. 사용자가 직접 작동해야 하는 기기에 디지털 방식이 채택되는 추세도 시각장애인들에게는 그다지 달갑지 않다. 작동 버튼들이 평면에 가까운 소프트터치 방식으로 바뀌는 게 많아지기 때문이다. 은행마다 설치된 현금자동입출금기(ATM)는 음성 안내 기능을 갖추고 있지만, 시각장애인이 터치스크린을 이용하기란 불가능하다.

허주현 전남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장(시각장애 1급)은 “내년 4월부터 장애인 차별금지법이 시행되면 점자 표기 여부가 대표적 차별 사례의 기준으로 꼽힐 것”이라며 “장애우들이 사회생활에서 겪는 불편을 최소화하는 것이 선진국, 평등사회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했다.

한겨레(http://www.hani.co.kr),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